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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일 목요일

AI로 숫자를 만들었더니, 숫자가 나보다 먼저 진지해졌다

노란 K 후드를 입은 옐로 K맨이 정장을 차려입은 0.0004 숫자 캐릭터와 SPECIMEN 표시가 있는 가상 명세서를 바라보는 익살스러운 삽화
숫자가 나보다 먼저 정장을 입었다. AI 생성 삽화이며, 예시 숫자와 가상 문서는 실제 자산이나 수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날 나는 한숨에 가격을 붙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진 물건들의 가치를 적어놓고 그걸 호흡 횟수로 나눠보는 중이었다.

왜 그런 걸 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나는 요즘 이런 걸 자주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 하나가 들어오면 AI를 붙잡고 실제로 만들어본다.

이번에는 이름까지 있었다.
Worth of Breath.
내 한숨의 가치.

뭔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하는 일은 별것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몇 개를 적는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직접 숫자를 넣는다.
그걸 편의상 정한 1년치 호흡 수로 나눈다.
분당 15회라고 놓으면 1년에 7,884,000회.
내가 실제로 몇 번 숨을 쉬었는지 센 것은 아니다. 계산을 위해 정한 기준이다.

그러면 화면에 ‘한 호흡당 가치’라는 숫자가 나온다.
물건들의 예상가를 호흡 수로 나눈 비교값이다. 숨을 쉴 때마다 돈이 들어온다는 뜻은 아니다.
그랬으면 나는 벌써 심호흡 전문직이 됐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조금 웃긴 계산기였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숫자 뒤에 소수점이 붙는 순간

숫자에 소수점까지 붙으면 이상하게 조금 진지해진다.
예를 들어 0.0004 같은 숫자.
여기서 드는 숫자는 설명을 위한 예시다. 내 실제 소유물 금액이나 측정 결과는 아니다.
갑자기 뭔가 계산한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계산한 건 맞다.
그런데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가 입력한 물건 가격부터 정확한 시장가가 아니다.
중고 시세를 조사한 것도 아니고,
전문 감정사가 와서 평가한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지금 이 정도쯤 하지 않을까?”
하고 입력한 값이다.

그런 숫자 몇 개를 더해서 호흡 횟수로 나눈 것뿐이다.
그런데 결과가
0.0004
같이 나오면 묘하게 과학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소수점이 숫자를 진지하게 만든다.
“대충 아주 조금”이라고 읽으면 지나갔을 값도,
소수점 아래 네 자리까지 차려입고 나오면 연구 결과 같아 보인다.
계산이 구체적이라는 것과 입력값이 정확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여기서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AI는 헛소리도 너무 예쁘게 만든다

AI를 쓰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생각을 굉장히 빨리 형태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내가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면,
계산식도 정리해주고,
문구도 만들어주고,
결과 화면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

문제는 그 그럴듯함이다.

아이디어가 아직 장난 수준이어도 결과물은 꽤 멀쩡하게 나온다.
그러다 보니 만든 사람조차 잠깐 착각한다.
“어? 이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이번 것도 그랬다.
한숨의 가치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진짜 경제 지표는 아니다.
그냥 내가 가진 것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자는 실험에 가깝다.

그런데 숫자가 나오고,
깔끔하게 정리되고,
마지막에 기념 수표처럼 생긴 결과물까지 만들어놓으니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냥 재미로 만든 계산이
무슨 개인 자산 분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좀 곤란했다.
나는 한숨을 감정하는 금융기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기능보다 먼저 정할 것

여기서 구입가를 넣거나,
사용 기간에 따라 자동으로 감가상각을 하거나,
AI가 중고 시세를 찾아서 가격을 추정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기능을 붙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검증할 근거 없이 그런 기능까지 붙이면,
숫자가 더 정확해지기보다 더 정확해 보일 수 있다.
그건 먼저 생각해볼 문제다.

현재 이 툴은 사용자가 생각하는 값을 직접 적는 방식이다.
AI가 가격을 평가하지 않는다.
자동 감가상각도 하지 않는다.
기본으로 보이는 가격도 ‘예시 예상가’이고 직접 고칠 수 있다.

이 값은 감정가가 아니다.
실제 자산 평가도 아니다.
사용자가 직접 적은 추정값으로 만든 개인적인 계산이다.

기념 수표처럼 만든 결과물에도 아예
SPECIMEN.
NOT NEGOTIABLE.
현금화 불가.
같은 문구를 넣었다.

웃기려고 만든 것에 너무 진지한 경고를 붙이니 그것도 조금 웃겼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장난은 장난이라고 써놓고 하는 편이 낫다.

숫자는 설명보다 목소리가 크다

이번에 만들면서 조금 새삼스럽게 느낀 게 있다.
적어도 나는 긴 설명보다 숫자에 먼저 눈이 간다.

예를 들어 본문에
“이 수치는 단순한 개인적 추정입니다.”
라고 열 줄 적어놔도,
화면 가운데 커다랗게
0.3754원
이라고 떠 있다면 눈은 먼저 거기로 갈 것 같다.

그리고 숫자가 구체적일수록 더 정확한 것처럼 느껴진다.
AI로 무언가를 만들 때 이게 꽤 위험한 부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I는 계산식과 결과 화면을 빠르게 만들어준다.
문장도 그럴듯하게 정리해준다.
그렇다고 계산이 맞다는 보증까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계산은 따로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맞게 계산했다고 그 숫자의 의미까지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입력값이 애매하면 결과도 애매하다.
가정에서 출발했으면 결과 역시 그 가정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결과 화면이 너무 멀쩡하면 그런 과정은 쉽게 잊힌다.

그래서 내가 만든 숫자부터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든 사람이 그럴듯함에 넘어가면 설명도 그쪽으로 기울 수 있으니까.

재미있는 숫자와 거짓말하는 숫자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런 걸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쓸데없는 실험을 좋아한다.

한숨에 가격을 붙여보는 게 무슨 세상을 바꾸는 일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던 걸 한 번 다르게 보게 만들 수는 있다.
그 정도면 나는 충분히 재미있다.

다만 경계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숫자를 만드는 것과,
그 숫자가 사실인 척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AI가 결과물을 점점 더 멀쩡하게 만들어줄수록 이 차이는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허술하면 허술한 티라도 났다.
지금은 아이디어가 허술해도 화면은 근사할 수 있다.
계산의 전제가 엉성해도 보고서는 반듯할 수 있다.
잘못하면 완성도가 신뢰도처럼 보인다.
그건 조금 무섭다.

그래서 요즘은 숫자를 만들고 한 번 더 본다

요즘 AI로 뭔가 계산하는 기능을 만들면 예전보다 한 번 더 보게 된다.
이 숫자는 어디서 왔지?
사용자는 이걸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과 그냥 가정한 것은 어디까지지?
굳이 소수점 네 자리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숫자가 너무 잘 차려입고 있는 건 아닌가.

복잡한 기능보다 무엇을 계산한 숫자인지 분명한 게 중요하다.
사용자가 적은 예상가를 더하고, 정해둔 호흡 수로 나눈다.
거기까지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숨의 가치를 진짜로 계산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아마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만든 이 숫자가 어디까지 장난이고 어디부터 계산인지는 말할 수 있다.

AI로 이것저것 무작정 만들어보면서 요즘 자주 배우는 게 이런 것이다.
AI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결과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이제는 만드는 것보다,
그 결과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정하는 일이 내 몫이 됐다.

한숨에 가격을 붙이다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이왕 붙인 가격이니 오늘 한숨은 조금 아껴 쉬어야겠다.

관련 도구: Worth of Breath · 내 한숨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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